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에프터 스토리/루인 섀도어

DID

by 쩡만이 2022. 6. 5.

그 녀석이 나 대신 몸으로 모든 고통을 받아내느라 고생 좀 했었지, 어떻게보면 자업자득이지 않을까. 싶었는데, 약해진 상태로 항복하며 반 강제적으로 굴복된 채 얻은 보상은 많이 허무했다. 솔직히 계속 안에 머물면서 감시자 마냥 바라보기만 하니 녀석의 역경과 절망을 바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. 관음한다고 해야하나, 의식이 끊기면서 새로 태어난 몸에서 부터. 그땐 분노만이 가득했지, 알 수 없는 영혼이 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어. 기분 나빠, 넌 누구냐고. 질문해도 처음엔 들리지 않았다. 하지만, 녀석이 심한 스트레스를 받거나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이후, 난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. 그렇게 악연이 시작되었건만.

 

약해빠진 정신으로 버틸 수 없던건지 결국 몸과 마음이 함께 깊은 어둠 속으로 빠지면서 녀석은 완전히 스스로 봉인된 채 나에게 몸을 맡기고 사라졌다. 그 후는 딱히 기억 안난다. 힘의 해방과 함께 근처에 있는 애들을 전부 초토화 시켰었나. 그렇게 장본인의 눈에 들어, 무슨 충동이였는진 모르겠다만,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. 먹을 것도, 잘 곳도 챙겨주니까 딱히 불만은 없다. 물론 예전에 살았던 취급과는 완전히 반대가 되버렸지만.. 새로운 기억의 파편이 맞춰질때마다,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감각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니까 괜찮았다.

 

근데, 왜 그랬더라. 재미를 위해서? 물론 재밌으면 다 좋지만. 이거, 내가 재밌어하는게 맞나? 가치 없는 인간들을 하나 둘 썰어 재낄때 마다 느껴지는 순간의 쾌락은 분명히 있다. 그 뿐이야. 그 애는 이런거 되게 싫어했는데. 가끔 얼굴을 보면.. 이건 엄마랑 아빠한테서도 볼 수 없는 이상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. 왼쪽 눈은 아빠가 맞는거 같은데. 오른쪽은 많이 일그러진 흉터와 같은 기괴한 모양. 이건.. 내가 가질 수 있는 문양이 맞나?

 

이 곳에서의 생활이 계속 될 수록 내가 처음에 추구했던 목표와는 멀어지는거 같았다. 목표.... 이젠 기억도 안나. 내가 뭐하려고 했더라, 기억을 실 처럼 이어봐도.. 중간중간 비어있는 파편은 도통 생각나지 않았다. 실험을 받고 고통 받은건 내가 아니라 그 녀석이니 알 빠는 아니다. 그때의 충격으로 기억이 날아간건가. 그거까진 기억할 수 없어. 어째서인지 계속 인간을 죽이는 행위 자체도 그들과 같이 가치 없다고 느껴졌다. 눈의 초점이 흐려진다. 자신의 손을 바라보면서 멍하니 생각에 잠긴다. 내가 정말 나라고 할 수 있는걸까. 움직이는건 내 자아고 선택이야.

 

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분명 능동적으로 행동하고 있다. 내 안에 있는 녀석 같은건 존재하지 않는다. 근데도 뭔가 허전했다, 사악함이라는 본능에 이끌려 감정에 충동적으로 이끌리는 모습, 목표를 이뤘는데도 전혀 기쁘지 않아. 내가 원하는건 이게 아니였던가? 그 당장 눈에 보이는걸 착각한건가. 실소가 터져나왔다. 이건 누가 웃는거지? 내 몸으로 일단 웃으니까 내가 웃는걸까. 가볍게 생각하자, 너무 깊이 생각하면 그 늪에 잡아먹히고선 회의감만이 남을 뿐이다.

 

정신 차려보니 자신의 머리카락을 몇 가닥 스스로 뽑은 채 움켜쥐고 있었다. 참 많이도 뜯었는데.. 나 분명 자고 있던거 아니였어? 마지막 기억은 침대에 누운걸로 끝났는데. 일어나보니 침대 벽에 웅크린채로 있었다. 기분 나빠. 신경쓰지 말자. 이거, 설마 녀석인가? 이젠 니 녀석이 내 포지션이 된걸까? 그래.. 기분 어때, 끝 없는 어둠 속에서 방관만 하고 있는 느낌이. ...이런 생각해도 아무런 메아리도 들리지 않아. 정말 내 안에 누군가 있긴 한거냐.

 

대답은 들려오지 않고, 계속 스스로 혼자 되풀이 한다.

 

오늘은 배식으로 빵이 나온다는데, 넌 어때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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